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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2-10-15 (월) 10:17
분 류 수요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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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000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25-34)
마태복음 6장 19-2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사치스럽고 불필요한 재물을 이기적인 욕심을 위하여 이 땅에 쌓아 놓는 부자들의 태도를 꾸짖는 말씀이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은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등에 대한 태도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둘 다 영적인 문제들을 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부자는 확실한 보장이 없는 재물을 의지하며 자기 만족을 하고 있고,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의심하며 염려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재물이 많고 적고 간에 그 재물에 대한 태도가 그 영적인 상태를 가르쳐 주는 지표가 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 땅의 재물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한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은 비록 이 땅에 살지라도 하나님 나라, 하늘의 것에 주된 관심을 갖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 가운데 많은 부분이(16/38) 돈, 물질에 관한 것이며, 신약성경 전체에서도 많은 부분이 이 주제를 다루는 데에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예수님께서 세 번씩(25, 31, 34절)이나 명령하시는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삶의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면 염려하는 모든 것들이 다 채워진다고 하십니다. 우선, 염려하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를 설명해 주십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기에 염려는 불신앙입니다(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라고 하신 것은 앞 24절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주인 오직 하나님이라고 하신 말씀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이 너희의 주가 되시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도가 염려를 하는 것은 그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것이며, 불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의 원어적 의미에는 ‘이미 되어진 일을 멈추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염려를 멈추고, 다시 염려를 시작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목숨”의 뜻도 지정의와 영적인 삶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주로 모시고 사는 이상 삶의 그 어떤 것도 염려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염려는 하나님의 약속과 돌보심을 믿지 못하는 죄인데, 어쩌면 성도들이 가장 자주 범하는 죄일 것입니다. 영어의 worry 라는 말은 舊 독일어의 ‘strangle’ or ‘choke’ 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염려가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마 어떤 다른 이유보다 우리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목 조르는 것이 염려일 것입니다. 염려는 성도의 정상적인 정신 상태인 자족(contentment)의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모든 성도는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고 한 바울의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자족은 오직 이 세상 모든 것의 주권자되시며, 다스리시고, 필요한 것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어 지고,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땅의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고 하였고, “여호와의 광대하심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만유의 머리 심이니이다”(대상 29:11)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이 다 주께 속하였고, 앞으로 소유하게 될 것도 다 주께 속한 것이라고 한다면, 주의 것을 가져 간다고 해도 무엇을 염려한다는 말입니까?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고 control 하십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2)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도의 필요한 것을 다 허락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자족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릴 희생제물을 준비해 놓으심을 보고 하나님을 묘사한 이름입니다(창 22:14).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삶의 필요는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인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입니다. 사실 미국에서 사는 우리들에게는 너무 풍족한 것들이어서 염려가 잘 안되는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 당시엔 음식과 물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산에 눈이 적게 오면 강이나 시냇가에 물이 적어 농사가 잘 되지 않아 먹을 것이 모자라며, 당연히 마실 물도 귀한 것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을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그런데 목숨이 먹는 것, 마시는 것보다 더 중요하며, 몸이 옷보다 더 중요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중요한 것을 모르고 덜 중요한 것에 온갖 신경을 쓰고 삽니까? 심지어 신자들까지 말입니다. 목숨과 몸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모르고, 그런 것을 위하여 산다고 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삶 전체가 주께로부터 온 것인 줄 알고, 적게 주시던, 많이 주시던 모든 것이 다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안다면, 우리는 단지 허락하신 모든 것을 감사하며, 주를 위하여 지혜롭게 사용하며, 이기적으로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닌, 남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기에 염려는 불필요 합니다(26-30절).
  26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천부이시기에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느냐?’ 고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26절에는 먹는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하십니다.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이 다 그렇듯이 한 마리의 새도 그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온 세상에 먹을 풍성한 자원을 허락하시며 그 자녀들에게 주십니다. “어린 까마귀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 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욥 38:41)고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합니다. 미천한 새 한 마리조차 돌보시며 먹이시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식들을 돌보시며 먹이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북한에 많은 동포들이 굶어 죽어도 지하 처소교회 신자들은 한 사람도 굶어 죽는 사람을 못 보았다는 김 진경 총장님의 간증을 듣지 않았습니까? 믿음 때문에 순교는 하여도 말입니다.
  물론 새도 가만히 앉아서 먹을 것을 받아 먹지는 않습니다. 얼마나 부지런히 먹을 것을 찾아 다닙니까? 그러나 찾아 먹고 나서 다음에 먹을 것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배 터지도록 먹지도 않습니다. 새 장에 갇힌 새나 그렇게 먹어대지요.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을 가지고, 허락하신 직장이나 사업체에서 열심히 일하여 우리의 필요를 공급 받는 것입니다.
  27절에는 오래 사는 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고 하십니다. 여기 “키(height or years)”라고 번역된 것은 년 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어떻게 해서든지 건강을 유지하여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려는 데에 온갖 신경을 씁니다. Exercise도 하고, 잘 먹되 조심이 diet도 하고, 각종 영양제나 비타민도 섭취하며, 의사를 찾아가 정기검진도 하고, 상식적인 육체 관리를 하면서 몇 년이라도 더 살아보려고 말입니다. 물론 그런 노력이 우리 삶의 질을 높이고 생산성을 극대화하지만 하나님을 밀어 붙여서 생명을 연장시킬 수는 없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Mayo Clinic의 Charles Mayo 박사는 ‘염려는 혈액 순환과 심장, 선(腺)과 전체 신경조직에 영향을 준다. 나는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죽은 사람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지만, 염려로 인하여 죽은 사람은 많이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 땅의 육체를 위하거나 이기적인 욕심을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선하신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이유를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세 번째 예는 28-30절에 들의 꽃을 비유로 옷 입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고 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무리들 대부분은 아마 옷이 한 벌 정도 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던 모양입니다. 야생화 중의 백합을 비유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관심과 돌보심, 예비해 두심 등을 말씀하십니다. 백합화가 자신 스스로 그렇게 아름다운 색깔을 내며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역사이심을 말하면서, 그 화려했던 솔로몬의 영광도 그것에 비교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또한 금방 시들 꽃, 아궁이에 던져져 없어질 꽃도 그렇게 아름답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영생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얼마나 관심과 사랑을 쏟으시며 입히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그런 염려를 하는 사람 가운데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신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것이라는 믿음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구원 받는 믿음(faith)은 있는지 몰라도 하나님을 신뢰하지는(trust)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사탄을 물리치시고,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심을 믿으면서도, 매일의 삶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드시 허락하신다는 것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염려는 사소한 작은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신실함을 믿지 못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을 의심하며, 문제를 삼는 죄입니다. 염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 내 주위 환경과 내 관점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염려는 자동적으로 사라지고 오히려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31-33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합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하였듯이, 염려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기에 죄가 될 뿐 아니라 비이성적(unreasonable)입니다. 터무니가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염려한다면 이해가 되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염려한다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안에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의 소망을 이 땅에 즐기는 것들에 둘 수 밖에 없습니다. 현실 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물질주의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영적, 육적 필요를 채워주는 하나님이 없기에 자기 자신을 위해 눈에 보이는 것 만을 취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지 않으시니 이 세상에서 염려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들의 神은 사탄이 조종하는 사람이 만든 신이기에 두려움과 공포에 떨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시기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지라"(빌 3:19), 또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하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전 15:32하) 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믿음 있는 성도는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2절하) 하셨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는 것입니다(빌 4:6). 그들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며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알기 원합니다(롬 12:2). 바로 그것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33절). 염려하는 까닭은 이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으며,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찾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 함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다스리는 나라를 말합니다. 즉 그의 섭리(攝理)와 그의 주권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일에 우리의 삶을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젠가 말씀 드렸지만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세가지 밖에 없는데 곧 하나님, 성경 말씀, 사람의 영혼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전도하고 하나님께로 인도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입니다. 또 그의 의라 함은 하나님의 의로우심, 거룩하심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나니"(마 5:6) 하셨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5:10)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이 나타나야 합니다(벧후 3:11하). 사람들 앞에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마 6:1).
   제가 고등학교 2학년, 1974년 12월 31일 송구영신예배 시간이었습니다. 당시 서울 경향교회 담임하시는 석원태 목사님께서는 송구영신예배에 성찬식을 하시면서 한 사람씩 나와 주님의 떡과 잔에 참여할 때에 각각 성경 말씀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때 제가 받은 성경말씀이 바로 오늘 읽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33절) 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오늘까지 이 말씀이 제게는 삶의 이정표가 되어 왔습니다.
   저는 불신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불교 집안에서 자랐으나 한국의 온갖 혼합종교 신앙이었고, 아버지는 이북에서 홀로 내려와 자수성가 하신 분으로 자신 만을 믿는 무신론자였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에 처음으로 친구 따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으나 열심은 없었고 단지 친구를 만나고 놀기 위하여 갔습니다. 주일을 빠지기도 잘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2학년이 되어서 좋은 학급 친구의 영향으로 이렇게 다니다가는 아무것도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주일을 꼭 지키며, 한참 대학 시험공부에 쫓기면서도 모든 예배에 참석하며 열심을 내었습니다. 어머니의 무속신앙 혹은 불교신앙은 참 진리가 아니라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2, 3년이 지나고 대학에 다니던 어느 날, 그 동안의 목사님의 설교로 신앙이 생겼고, 성경공부로 신앙이 자라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입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게 됨을 느끼고 감사하였습니다. 어머니도 교회로 인도할 수 있었고 동생들도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만 교회로 인도하지 못하다가 대학 졸업하고 2년간 직장생활을 한 후 미국 유학 길에 오르면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온 식구가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식구들의 믿음은 그 후에 각자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정말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친한 친구의 온 가족이 제가 대학에 들어갈 때 미국 이민을 떠나는 것을 보았던 저는 유학을 꿈꾸게 되고, 대학 졸업과 함께 직장생활을 하면서 TOFEL 시험공부를 하고 실천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1982년 7월 직장생활에서 모든 돈 $3000과, 아버님, 그리고 교회 당회원, 교사들이 도와준 $2000을 들고 Washington National Airport 에 도착한 저는, 도착하자 마자 친구에 대한 실망과 경제적인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에 첫 학기 등록을 하고, 일을 하기 위하여 중고차를 사고, 첫 달 방세를 지불하고 나니 앞으로 먹고 살 길이 막막 하여지기 시작했습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Grocery 가게에서 힘든 일을 하기도 하고, 빌딩 청소를 하기도 하며, 세탁소에서 일을 배우며 생계를 꾸려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에야 돈의 가치를 알게 되어 $1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아버지께서 얼마나 고생하며 저희들을 키우셨는가 생각이 나서 아버지가 제일 보고 싶었습니다.
   공부도 한국에서 생각하던 것과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영어도 문제였지만 석사 과정은 평점이 B 학점이 안되면 퇴학을 당하므로 신경이 무척 쓰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박사과정에 있는 어느 집사님의 도움을 받고 약 3년 반에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기적으로 여깁니다. 그 동안 이사도 16번을 하면서 싼 곳을 찾아 다녔습니다. 한번은 이틀을 원치 않는 금식을 하면서 배가 고파 울어 본적도 있고, 몸이 아플 때면 서러움에, 부모님 생각에 눈물을 흘리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와중에도 늘 생각나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교회 생활은 물론이고,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에 성경공부 그룹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온 많은 유학생들을 상대로 모여 보려고 하였습니다. 공성도 형제와 임주혁 형제, 그리고 시작하자마자 바로 협조하기 시작한 함태문 형제들과 함께 그 당시 장석현 전도사님을 모시고 함께 기도와 성경공부에 열심을 내면서 그 때 이 곳 Washington 지역에 불던 청소년 부흥운동과 함께 은혜를 사모하며, 대학생 전도에 힘을 내었습니다. 지금 제 사모도 만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외롭고 힘들던 시절에 제게는 천사와도 같이 여러 도움을 주었고, 힘이 되었습니다.
   석사과정을 1년여 남겨 두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제게 영혼 구령을 위한 전담 사역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석사 공부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고, 사모도 약학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국에서 결혼을 하고 온 후 바로 Dallas Theological Seminary 로 떠나게 되고 4년 후 목사 안수를 받고, Westminster Seminary 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하다가, 지금은 사라졌지만 이 지역의 작은 교회에 청빙을 받아 열심히 사역을 하였지만, 기득권 세력과 비전이 맞지를 않아서 18년 전에 개척을 하여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사모와 저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으나 너무도 풍성한 삶을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진리임을 체험적으로 증거합니다. 전부가 다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미래의 일 때문에 염려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마지막 34절에“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미래에 대한 준비는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요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내일의, 아니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 3:22-23)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염려하는 일에 헌신되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금 염려할 것이 없으면 내일 일까지 가지고 와서 염려하지요.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께서 내일 일을 책임지시고 돌보실 것을 믿어야지요. 하나님 손 안에 내일 일이 있음을 믿어야지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라는 말이 내일 염려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일의 일은 내일에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는 말입니다(Tomorrow will take care of itself). 그리고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의 의미도 염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 당하는 사탄의 유혹이나, 시험, struggle 등을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구원의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그에게 초점을 맞추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만 은혜를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일도, 아니 영원히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먹고, 살고, 입기 위하여 전혀 신경 쓰지 말고 일하지 말라 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불신자들 같이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것들을 위하여 애쓰고 염려하지 말고 더 중요한 것들, 영원한 것들을 추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필요한 것은 채워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무슨 염려를 앉고 오신 분 계십니까? 정말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주(Lord), 주인으로 믿습니까? 그러면서 염려를 하시면 불신앙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따르는 그의 자녀입니까? 그러면서 염려하시면 정말 쓸데없는 불필요한 염려입니다. 다 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믿음과 염려는 같이 가는 단어가 아닙니다.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으시면서 염려하시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문제는 믿음, 신뢰입니다. 정말 믿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내 죄 위하여 피흘려 돌아가신 분으로 믿습니까?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신 분으로 믿습니까?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오늘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 위하여 간구하시는 분으로 믿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이 온 우주의 주재, 주권자이십니다. 여러분의 주인이십니다. 아버지되십니다. 내일을 책임질 영원한 분입니다. 모든 것을 맡기세요. 오히려 하나님 나라와 의에 헌신하세요. 모든 것 다 풍성하게 채우십니다.
   영국의 유명한 목회자이자 신학자이신 John Stott 목사님은 말씀하시기를 "마치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야망, 자신을 위한 것과 하나님을 위한 것, 이 있듯이 결국에는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뉜다. 하나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사는 사람과 하나님 중심으로 그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는 사람이다" 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외에 다른 종류의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합니까? 무엇을 위하여 사십니까? 정말 신자라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편에 설 것입니다. 또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 모든 것을 더하십니다. 성경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믿고 그렇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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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4 주일설교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신 23:15-25) 한태일 목사 2012-12-06 1999
1073 송구영신예배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삼하 7:25-29) 한태일 목사 2013-01-02 1998
1072 주일설교 [1/25/09] 서로 용서하는 모임 한 태일 목사 2009-01-25 1998
1071 수요설교 올바른 기도 한 태일 목사 2011-01-07 1997
1070 주일설교 신앙 양심의 증거(고후1:12-14) 한태일 목사 2013-09-30 1995
1069 주일설교 영적 은사 (5) (고전 12:21-31) 한태일 목사 2013-05-06 1995
1068 주일설교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연합(3)(롬 15:1-13) 한태일 목사 2016-12-12 1993
1067 주일설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요 4:23-24) 한태일 목사 2014-01-06 1993
1066 주일설교 진심으로 용서하면 모두가 복을 받습니다(고후 2:5-11) 한태일 목사 2013-10-28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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