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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2-09-10 (월) 08:36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668    
교만한 마음을 먹지말라(고전 4:6-13)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교만입니다. 맨 처음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사탄도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속였습니다(창 3:5). 교만을 그들의 마음에 집어넣으려고 했고, 성공했습니다. 아니 그 이전의 타락한 천사도 하나님처럼 되려고, 교만하여져서 제 위치에서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하다가 타락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경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을 망하게 하시고, 오히려 겸손한 사람들을 높이신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일관되게 겸손을 가르치시고, 겸손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을 가리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제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내시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이 겸손을 배우지 못한 것 같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영웅들과 같은 성도들에게서나, 바울에게서나, 심지어 주님에게서eh 겸손을 배우지를 못했기 때문에 지금 고린도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분열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간곡히 권면합니다. 서로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라고 말입니다.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지 말라고 말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거룩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6절)고 합니다. “이 일”이라 함은 지난 주일에 살펴본 1-5절까지 말씀에서 바울 자신과 아볼로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충성을 다하였고, 하나님께서 나중에 다 감추인 것과 마음의 뜻을 밝히실 때에 드러날 것이니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과 아볼로는 주님 사랑과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며 본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성도들이 바울이든 아볼로든, 베드로든 주 안에서 그들을 경건하게 존경하는 것은 좋은 데, 경건하지 못하게 자기 자랑을 위하여 그들을 추앙하며,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짓는 것은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서 교만과 속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교회가 분열되고 약해졌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을 가지고 주의 종들을 따른다 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어떤 결과를 기대할 때 결국 그들은 거짓된 열매를 거둘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열심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기초가 안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씨를 뿌린 후에 물을 주어 싹이 난 후에 잡초를 뽑고 계속 물과 비료를 주어서 자란 후에 꽃이 피고 나서 열매를 찾아야 하는데,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 열매만 찾으니까 결국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고 마는 것입니다.
   즉 신비주의나 은사주의에 빠져서 어떤 신비한 체험을 한 사람이 성경 말씀은 잘 모르면서 자기는 이미 다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만에 빠지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지식을 교회 안에 갖고 들어와서 자기는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 지식에 부족한 사도들, 전도자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그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을 바울은 그들이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고 있다고 합니다.
   믿음이 성숙하게 되는 것은 규모가,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거듭나는 것이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이미 씨가 땅에 떨어졌다고 더 이상 복음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율법주의(legalism)로 빠집니다. 십자가의 복음의 은혜를 기억하지 않고, 그저 내가 율법을 지켜야 의를 이룬다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의를 내세우며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도 은혜로 받으며, 경건하게 사는 것도,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복음은 아직 주님을 모르는 자나 이미 구원을 받아서 믿은 지 오래된 자나 모두에게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의 소망의 복음은 지속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묵상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 싹이 난 자들은 계속 물과 비료를 먹으며, 잡초를 뽑아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미 구원을 받은 자가 어떻게 생활을 해야 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도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교리를 배워야 하며, 악한 사탄 마귀들과 싸우기 위하여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기록한 말씀에서 배워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말입니다. 각종 제자훈련이나 성경공부를 통해서 말입니다. 구역 모임과 같은 소그룹에서 말입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 서로 기도해 주며, 서로 붙들어 주고, 서로 신뢰하게 됩니다. 한 피 받아 한 몸이룬 한 가족 관계가 튼튼해지면서 경건이 자라게 됩니다.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그리하여 옛날에는 이길 수 없었던 유혹을 이기게 되고 함께 모이게 되면 신비스럽게 위로와 힘을 얻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열매들을 맛보게 됩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우리 신앙의 핵심에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고 가르치는 ‘교회’에 속해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참된 진리의 교회 중심의 삶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않는 안전장치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신앙은 뿌리가 약한 신앙입니다. 언제든지 유혹에 쉽게 넘어질 수 있습니다. 믿음은 절대로 속성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자라는 것처럼 성장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 양육을 받아 개개인이 자라고, 교회적으로 성장하며 은사가 개발되며 열매를 거두는 것이 정도(正道)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고린도교인들의 교만을 책망합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하기를 원하노라”(7-8절)고 말입니다. 그들을 구별하여 선택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받은 모든 은사들, 선물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인데 마치 거저 받지 않고 자신들이 노력하여 받은 것처럼 자랑하느냐는 꾸짖음입니다. 교만이 들어가 이미 배가 불러 있어서, 마치 나중에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되는 일이 있는데(딤후 2:12, 계 20:4), 심판장이신 주님과 함께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왕 노릇을 하게 될텐데, 이미 이 세상에서 사도들을 제외해 놓고 그런 왕 노릇하고 있으니 얼마나 가관이냐는 말입니다. 여기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하기를 원하노라” 한 것은 사도들이 그들을 다시 붙잡아서 말씀의 기초 훈련부터 시켜야 되겠다는 뜻입니다. 같이 주님과 함께 왕 노릇을 하기 위해서 다시 그들의 왕이 되어야 하겠다 빗대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그들의 자유와 그들의 은사를 제한시켜 말씀을 듣는 자리에, 겸손을 배우는 자리로 돌아오게 해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고린도전후서를 기록하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어찌하든지 기초를 든든히 해야 합니다. 복음 위에, 진리의 말씀 위에 모든 것을 세워야 무너지지 않습니다. 생수의 샘인 교회에서 겸손을 배워야 참된 열매를 맛볼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바울은 9-13절까지 자신의 겸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많은 고난 가운데 적나라하게 드러난 겸손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하여 죽이기로 작정한 자처럼, 왕 노릇하며 다스리기는커녕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두시고, 세계 모든 사람에게, 심지어 천사들에게조차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9절). 여기 ‘구경거리’라는 뜻은 당시 원형 경기장에서 많은 로마 사람들이 보는 앞에 맹수들에게 찢겨 죽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얼마나 고린도교인들과 대조적이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10-13절)고 고백합니다.
   이 구절들은 고린도교인들의 자기 자랑과 교만을 완전히 뒤집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그들은 회개할 필요를 느끼고 회개했어야 합니다. 사도들은 고린도교인들과 달리 교만하지 않으며 지적 받을만한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왕 노릇하는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친히 수고하면서 일을 하고 온갖 핍박을 당하면서도 참았습니다. 자신들이 세상의 더러운 것으로, 찌꺼기처럼 취급을 당하여도 아무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도살당할 어린양처럼 말입니다.
   어떻게 그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참고 견디며 겸손히 주님께서 명하신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생각을 지배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주님을 본받아 바로 자신들이 교만하지 아니하며, 다른 사람을 주장하는 자세도 안 되며(벧전 5:3), 그저 한 영혼이라도 더 살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취급을 당해도, 어떤 대접을 받아도 순수한 복음만 전할 수 있다면, 진리의 말씀만 선포할 수 있다면 된다는 심정이었습니다. 아무리 욕을 먹어도 인상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축복했습니다. 사랑으로 권면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직분을 올바로 감당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린도교인들은 직분을 맡은 자가, 은사를 받은 자가 왕 노릇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더 이상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최고의 찬사를 듣고 있었습니다. 이런 교만이 영혼을 살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오히려 죽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직분자들은, 아니 모든 교우들은 이런 바울과 같은 사도들에게서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참고 견디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가장 힘들고 귀찮은 일도 말 없이, 기꺼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절대로 입에서 불평이 나오면 안됩니다. 섬기는 사람의 입에서 불평과 불만이 쏟아져 나온다면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한 영혼을 위해서라면 스스로 낮아지기를 두려워 말아야 합니다. 욕을 먹어도 참아야 합니다. 주님 영광을 위하여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밑바닥까지 낮아지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러했었습니다. 배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정말 겸손합니까? 주위 사람들로부터 겸손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까? 사람은 그냥 가만히 자신을 두면 저절로 교만의 마음이 들게 되어 있고,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교만을 물리치고 겸손하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복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참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겸손하기를 원하신다면 교회를 중심하고 사십시오. 서로 말씀으로 권면하여 위로하며 낮은 자세로 섬기십시오. 여러분의 영이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교만의 마음이 싹트면 당장 잘라버릴 수 있습니다. 늘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신데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은혜와 겸손의 본을 보이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런 주님을 닮아가고자 애쓰신다면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겸손한 자들을 저 천국에서 주님께서 높여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고 하셨습니다. 또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교만한 자들의 결국은 다 망하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리의 말씀 안에서 겸손하게 서로를 섬길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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