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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2-06-05 (화) 01:07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638    
너는 나를 따르라(요 21:18-25)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에 가장 시험에 잘 빠지는 경우가 다른 성도들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일하면 괜찮은데, 자꾸 주위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며 상관하는 경우입니다. ‘왜 나는 열심히 하는데, 저 사람은 왜 하지 않지? 혹은 나는 이렇게 하는데, 왜 다른 사람은 저렇게 하지?’하면서 비교하면서 신경을 쓰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부족하지만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보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어서 사탄의 시험을 받게 되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C.S 루이스는 부유하거나 똑똑하거나 잘생겼기 때문에 사람이 교만하지는 않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더 부자이거나 또는 더 똑똑하거나 더 잘생겼기 때문에 교만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만약 이 비교 의식이 없다면 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서 자기가 의롭다고 감사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눅 18:11). 감히 고개도 못 들고 기도하는 세리와 비교해서 더 낫다고 하는 교만에 빠져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였기에 주님께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신 것입니다(눅 18:14).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시면서 그에게 사랑의 고백을 하게 하신 후, 과거의 실패로부터 회복하게 하시면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양을 먹이고, 돌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절)고 하셨습니다. 여기 ‘젊어서는’ 이라는 뜻은 그가 미성숙했을 때를 말합니다. 신앙이 성숙하지 못했을 때에는 자기 나름대로 계획도 세우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여 여기 저기 다니면서 자기 힘으로 일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늙어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 다니며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일을 하다가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숙한 성도들의 특징은 주님의 손에 완전히 붙잡혀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 사로잡힌 노예처럼 사는 것입니다. 목수들이 가장 좋아하는 연장이 자기 손에 딱 맞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참 자질도 좋고, 은사도 있는데 좀처럼 주님의 손에 잡히지가 않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좀 잡으려고 하면 빠져서 달아나 버립니다. 자꾸 자기가 주님의 손을 주장하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주님의 손에 붙잡히기에 너무 바쁘다는 것입니다. 자기 일을 하는 데에는 모든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는데, 주님께서 좀 사용하려고 하면 바쁘다고 핑계를 대고 빠져 나갑니다. 물론 어떤 때에는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일을 하는 것이고, 자기 이름을 내는 것이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잡혀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일을 감당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주님의 손에 붙잡혀야 성령의 힘으로 일할 수 있고, 성령의 힘으로 주님의 일을 해야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납니다. 진정한 회복과 부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주님의 손에 붙잡히지 않으면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5-26)고 하였습니다. 어떤 분이 주님의 일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죄에 쉽게 빠지는 이유가 주님의 손에 붙잡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순간에 죄에 빠져서 망하기 쉽습니다. 구약의 삼손의 예를 보면, 하나님의 손에 빠져 나가 돌아다니다가 결국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눈알이 빠지고 머리털이 밀리는 수치를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잡혀야 안전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을 쳐서 주님께 복종하게 함은 자기가 남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자기 자신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고전 9:27).
   즉, 주님의 손에 붙잡힌다는 뜻은 자기 자아를 내려놓고, 자기 주장이나 고집을 버리고 주님 뜻에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그것이 참된 제자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8-39)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19절에 보시면 주님께서 18절 말씀을 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그렇게 주님의 손에 붙잡혀서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십자가의 길을, 고난의 길을 묵묵히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 멘!

   사도 요한은 18절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그의 순교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19절상)고 기록했습니다. 성경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쓸 때가 주후 90년 이후라고 여긴다면 많이 늙었을 때였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의하면 사도 베드로는 네로 황제 때 로마 대화재가 있었던 주후 64년경에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미 그가 순교를 하고 난 후 복음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18절 말씀을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 당할 것을 주님께서 예언했다고 이해한 것입니다. 그의 순교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 당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죽음이 베드로가 원하는 죽음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주님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아무리 주님을 위해서 죽기 원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잔인하고 끔찍한 십자가 죽음을 그가 원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십자가 죽음을 할 수만 있으면 피하려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다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감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길이었기에 묵묵히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말 원하지 않는 십자가 죽음이었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죽음이었기에 마다하지 않고, 아니 주님께서 십자가를 바로 지시고 죽으셨다면 자신은 거꾸로 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띠를 띠우고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하시면서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베드로는 옆에 있는 사도 요한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주님께 물었습니다(21절). 그 때에 주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22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제자들 사이에 요한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23절). 그래서 사도 요한은 주님의 말씀이 자기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만약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자기를 살게 하신다 하더라도 그것이 베드로에게 상관이 없다는 뜻이라고 부연 설명하였습니다. 각자가 다 다른 사명을 가지고 주님께서 다르게 살게 한다고 해서 우리 마음이 상할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왜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시는 일에 대하여 상관하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대로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이후로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사도 요한은 복음 전파로 인해 밧모섬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에베소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말씀을 가르치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 감독으로 일하다가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고, 사도 요한은 90세 넘게 살다가 주후 100년에 에베소에서 죽었습니다. 각각 다 다르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베드로가 요한을 바라보고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요한이 바울을 바라보고 부러워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각자에게 주신 은혜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가운데 다른 성도들을 원망하는 경우를 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늘 옆 사람을 바라봅니다. 꼭 다른 성도들을 끌고 들어가야 속이 시원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면 나도 하고, 그 사람이 하지 않으면 나도 안 합니다. 아니면 나는 하는데 그 사람이 안 하고 있으면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영적으로 미성숙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아직 주님의 손에 붙잡히지 않은 삶입니다. 우리가 어려서 아직 철들지 않았을 때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할 때가 많고, 우르르 함께 몰려 다니며 같이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유행에 민감하고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는 대로 따라 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주위 친구들이 하나씩 떠나게 되면, 사람들이 사라지게 되면 힘들어 합니다.
   우리는 성숙해져야 합니다. 영적으로 철이 들어야 합니다.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각자가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고, 때로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두고 떠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먼저 죽을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친구 때문에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 어머니 때문에 주님의 일을 못한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주님께서 물으실 때에 ‘누구 때문에’ 혹은 ‘무엇 때문에’ 하지 못했다든가, 소홀히 했다고 핑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어떤 장애도, 방해도 넘고 따르겠다는 각오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도 안 되고, 다른 사람 때문에 어떤 일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각자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있습니다. 좌우를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묵묵히 그 길을 가면서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면 됩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이제 요한복음의 강해를 끝마치게 되었습니다. 1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던 요한은 바로 자신이 오늘 대화에서 언급되고 있었던 제자임을 24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눈으로 똑똑히 보고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입니다. 여기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라는 표현은 초대교회의 증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함께 있던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함께 칭하는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도적인 증언들을 검증하며 확인해주는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있던 교회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25절)고 하면서 끝맺고 있습니다. 물론 요한은 이미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고 복음서의 목적을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다 기록하지 않았어도 택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에 충분한 복음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구절을 성경학자 윌리암 바클레이는 공감하도록 이렇게 설명을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서를 끝맺으면서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찬란한 영광을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단지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일들이 아무리 놀라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앞으로 경험하게 될 것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일들은 인간이 책으로 담기에 부족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헤아릴 수 없는 승리, 다함이 없는 능력, 무궁무진한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 복음서를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너는 나를 따르라”에서 ‘따르라’는 동사 헬라어 원어는 현재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계속, 지속적으로 따르라는 뜻입니다. 이 음성을 듣고 오늘도, 내일도 주님을 지속적으로 따르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장애물, 방해가 있더라도 이겨내고 계속 주님을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사실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말이 주님을 따르는 자라는 뜻입니다. 나의 자아를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최선을 다하는 자입니다. 주님께서 말하시는 대로 말하며, 주님께서 행하신 대로 행하며 따라가는 자입니다. 주님께서 서라면 서고, 가라 하면 가는 자입니다. 주님의 손에 철저하게 붙잡혀 사는 자가 되십시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던 상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는 다 주님 앞에서 결산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지혜롭고 충성된 종”(마 24:25),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마 25:21)이라는 칭찬을 받는 성도들이 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인생을 산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산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렇게 칭찬을 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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