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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2-06-25 (월) 09:2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802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고전 1:4-9)
여러분들은 ‘은혜(grace)’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생각이 나는지요? 우리 말에 가장 적합한 동의어가 ‘호의(好意)’, 영어로는 favor 라고 할 수 있는데,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좋은 마음으로 베푸는 말과 행동의 표현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정말 아무 자격이, 조건이 없는데 거저 받는 선물을 은혜라고 합니다. 도저히 갚은 수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쉽게 다가오는 느낌은 ‘부모님의 은혜’ 특히 “어머님의 은혜’를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그 은혜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것입니다. 유한한 우리가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를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래서 나타내 보여주신 것이 하나님 자신의 아들을 우리의 죄를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에 죽게 하신 사실입니다.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타락한 도시 고린도에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 문안인사를 했습니다. 교회 안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의 해결을 위하여 편지를 썼는데, 먼저 하나님의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된 그들은 세상에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동시에,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제자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비록 고린도교회가 그렇게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감사할 것은 긍정적인 면이 분명히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익이 무엇인지, 성도의 유익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4절) 하였습니다. 여기서 ‘주신’은 과거 시제로 쓰여졌습니다. 이미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즉 이미 구원 받은 은혜를, 거저 받은 구원의 선물을 감사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히 되어”(6절)라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말씀 증거가 그들에게 각인되어서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이 하나님 은혜의 참된 의미와 그 중요성을 바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이 은혜와 함께 할 수 없는 세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와 죄책감은 함께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속성상 하나님께서 ‘내가 은혜를 베풀어 네게 구원을 주는데, 네가 한번 잘못하여 죄를 지으면 그 구원을 빼앗겠다’라고 하실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조건이 붙은 것이니까요.
   물론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셔서 죄를 모른 척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의 결과는, 심판은 사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롬 6:2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을, 심판을 다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이 은혜를, 선물을 받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내가 꼭 무엇을 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다른 종교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기도 하고, 도무지 인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못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무는 함께 하지 못합니다. 즉 ‘우리가 이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는 빚을 갚아야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은혜는 선물입니다. 대부 혹은 융자, 즉 Loan이 아닙니다. 물론 은혜는 우리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빚진 자로 만듭니다만, 그 대가가 너무 커서, 값으로 따질 수가 없기에 아무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안 갚아도 됩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을 가지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을 주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수천 만불 빚을 졌는데, 몇 페니 드리는 것을 가지고 빚을 갚는다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며 최선을 다해 섬기는 것은 그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공로와 함께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단지 ‘착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끼리 비교하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와 비교하면 사람의 최선이 ‘더러운 의’인 것입니다(사 64:6). 아무리 착해도 죄를 짓고 삽니다. 그 죄에 대한 죄책감과 의무 때문에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려고 하는 인간의 공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전혀 관계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착하게 산다 해도 하나님의 눈에는, 영적으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이 나쁜 소식을 해결하는 복음, 좋은 소식입니다. 할렐루야!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이미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임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현재에도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합니다.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5절)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 은혜의 유익은 주님 안에서 계속해서 지금도 우리 삶의 모든 일에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에 풍족하도록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교인들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모든 구변, 모든 지식을 주십니다. 구변(speech)이라 함은 하나님의 진리를 입으로 말하는 것이며, 지식(knowledge)은 진리를 말하기 위하여 필요한 지식을 뜻입니다. 진리를 다 안다는 뜻은 아닙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든 일을 감당하도록 필요한 모든 말과 지식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을 우리가 할 수 있게 하시고, 알아야 할 지식을 알게 하십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은사까지 주십니다. 7절에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데, 성도들을 섬기는데 필요한 모든 은사를 부족함이 없게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은사란 원어로 은혜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성도는 다 영적인 은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시면서 우리가 필요한대로 은사를 허락하십니다. 문제는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고린도교인들처럼 우리가 이 영적 은사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잘못 알고 있거나 무관심해서 개발을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은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는 과거에도 유익했고, 현재에도 많은 유익을 가져다 주듯이, 미래에도 우리 성도들에게 유익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7절하-8절)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현재도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여 책임을 다하지만,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미래에, 영광의 날에 주실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그 날은 온 세상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날이며(계 4:11, 5:12), 사탄 마귀들이 완전히 망하는 날이며(계 19:20, 20:10), 모든 믿는 자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여 우리 주님을 눈과 눈으로 마주 보며 영원히 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언급한 것은 고린도교인들에게 그들이 받은 축복의 본질을 일깨우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고린도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실제보다 더 풍성한 은사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더 큰 풍성한 은사가 앞으로 있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하여 말입니다. 또한 그들의 은사는 일시적인 것뿐이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받게 될 축복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습니다(고전 13:8-13).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날을 사모하며 전심으로 기다리기 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 주께 책망 받을 일이 없는 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끝까지 견고하게 하실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즉 아무리 지식이 많고, 말을 잘해도, 은사 체험이 많아도 주님 재림하시는 날에 실패자로 서서 책망을 받는다면 똑똑하여 말을 잘하고 은사체험이 많은 그 모든 것이 다 헛것이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 날에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자로 서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주님 재림하실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없게 될 것을 확신했던 이유는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9절)라고 한 것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자기 아들과 더불어 교제하도록 부르시고, 교제하게 하시는 분으로서 일향 미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끝까지 안전하게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 믿음직스러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뿐만 아니라, 성도들 서로가 나누는 교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기억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서로 교제를 단절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단절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지상에 있는 교회는 결코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많은 문제를 가진 죄인들이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교회를 점점 온전하게 하십니다. 주님과의 교제를 계속하면서, 우리의 부족한 점들이 점점 사라지면서 성화되어 가다가 결국은 완전한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와의 교제’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개인적으로 경건의 시간을 가지면서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와 신비로운 환상 가운데 하는 교제를 말합니까? 아닙니다. 문맥상으로 보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전입니다. 성전이라는 말은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 교회 안에 함께 계신다는 뜻이며, 결국 성령께서 교회를 온전케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가 교회 안에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라지면 교회는 죽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이 세상의 풍조가 밀려와 죄가 뒤덮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성령의 감동이 사라지기 때문에 교회가 영혼을 살리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상한 심령을 치료하고 영혼을 세우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버리시고 다른 곳에서 구원을 이루지는 않습니다. 때때로 교회가 하나님을 버릴 때는 있어도, 하나님께서 교회를 버리시지는 않습니다. 교회 지체들이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회복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회복되기만 하면 성령을 부으셔서 교회를 정결하게 하시고 치료하십니다. 다시금 구속역사를 이루어가는 도구로 삼으십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그 은혜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에도, 오늘도 필요에 따라 각양 좋은 은사를 주시는 때에도, 앞으로 주님 재림에 날에도 주님께 책망 받지 않도록 하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은혜를 붙잡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는 말씀을 붙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단순히 성경을 배우고 싶은 자들이 모인 모임이 아닙니다. 영적 전투가 치열한 최전방에 있는 부대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훈련을 받으면서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가 명령이 떨어지면 나아가 싸우는 부대입니다. 당시에 고린도 같은 아주 부패하고 타락한 도시에 하나님의 교회가 서 있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니 우리처럼 벌레만도 못한 죄인들이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 영적 전투가 치열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유는 우리 안에 아직 죄성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기려면 혼자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서로가 함께 지켜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하면서 서로 함께 지켜 주어야 합니다. 혼자 있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성숙한 사람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은 지혜로운 것입니다. 겸손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당시 어느 교회보다 똑똑했고 또 은사체험도 많았습니다. 바울은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인정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적인 능력이나 은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니 주님 재림의 날에 설 것을 기억하고,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는, 조금도 책망 받지 않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미쁘신 분입니다. 신실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부족을, 연약을 호소하기만 하면 아무리 어려운 문제 가운데서도 놀라운 은혜를 부으셔서 유익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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